일상 / / 2020. 9. 25. 17:17

공자와 플라톤의 차이 - 일일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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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라면 세 가지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1. 어질어야 하고,

2. 지혜로워야 하고,

3. 용기 있어야 한다.

 

 

 

공자

 

 

이러면 좋다는 거야 누가 모를까?

쉽지 않은 게 문제지.

얼마나 힘들면 공자 스스로도 자신은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게 없다 했을까?

공자급이면 할 수 있겠지만 사람인 이상 완벽하지 못하다는 겸손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 역으로

어질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용기가 없으면 군자가 아니라는 말인데.....

그럼 군자가 아니면 어떻다는 것인가?

 

군자의 반대되는 단어는 소인이다.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위의 군자의 3가지 조건을 보면 타인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자신에게도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는 타인에게 삶의 모범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에 반해 소인은 남에게 귀감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그런가? 자기만 아는 사람이다.

즉 자기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이 소인이다.

 

 

맹자

 

맹자가 그리 말했다.

'군자는 큰 몸(대체)를 따르고 소인은 작은 몸(소체)를 따른다'

이 말은 결국 자기 이익만 생각하냐 아니냐 하는 말이다.

 

보통 사람은 대체와 소체를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자기 손해가 크다 싶으면 대부분 소체를 추구한다.

 

지금 서점가를 덮고 있는 자기 계발서나 에세이들을 보면

대부분 소체를 추구하라 한다.

 

자기 행복, 자기 위로, 자기 회복 등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기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힐링이 휩쓰는 시대다. 온통 시선을 자기에게로 돌리라고 부추기고 있다.

 

 

 

'나는 소중하니까!'

이것이 현대인의 삶의 모토가 되었다.

 

공자나 맹자가 이 시대를 방문한다면 혀를 찰 것이다.

세상이 온통 소체만 추구하라고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왜 이리되었을까?

그건 대체를 주로 추구하던 구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라 생각한다.

 

대체를 생각과 행동의 기준으로 삼으니 개인들은 부당함을 인내해야 했다.

봉건적 권위주의의 뿌리가 바로 이 '대체'를 추구하는 것에 기인하지 않겠는가?

 

동양에서 '대체' 또는 '대의'를 확고부동한 기준으로 만들고 있을 때

비슷한 시기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대체를 알라고 한 것이 아니라 소체를 알라고 한 것이다.

물론 자기 이익만 추구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를 빌미 삼아 권력의 기반을 튼튼히 하려는 동양에 비해

사람 개인에 관심을 둔 서양은 이렇게 출발부터가 다르다.

 

소크라테스

 

동양에서 대의니 대체니 하고 있을 때

서양에선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고 있었다.

 

네가 안다고 뻐기는 게 제대로 알고나 하는 말인지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생각하다 보면 저절로 대의를 생각하게 된다.

자기 것을 내려놓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에선 주입식으로 강제로 대의가 옳다는 개념을 주입시켰다.

스스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주입식이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그건 동양에선 공자, 맹자가 기준이기 때문이다.

2천 년 넘게 공맹이 모든 것의 기준이었다.

그간의 학문은 공자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지 새로운 학설이 아니었다.

공자와 다른 말을 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이런 풍토에서 자기를 돌아볼 여유가 어디 있으며 그럴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공자, 맹자라는 모범 답안지만 남들보다 더 많이 외우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플라톤

 

미국의 철학자 화이트 헤드(도올 선생은 그를 백두 선생이라 부른다.)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일 뿐이다'라고 했다.

그 정도로 플라톤은 서양철학에서 절대적 위치에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 플라톤은 많이 매를 맞으며 지내오고 있다.

플라톤 철학도 비판할 줄 아는 게 서양 철학이다.

 

그러나 동양에선 공자, 맹자를 비판하지 않는다. 아니 못했다.

비판하는 순간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회가 경직되지 않겠는가?

어떻게 사회가 발전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같은 사람인데 공자, 맹자를 신격화하고 살았으니 사회 발전이 더딘 게 당연하다.

 

 

 

이러한 반작용으로 지금은 소체를 중시하는 시대가 된 거 아닐까 한다.

그리 본다면 소체를 중시하는 게 나쁜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이지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나쁜 건 아니다.

 

그래야 불의에 항거할 용기를 얻을 수 있고,

사기당하거나 위험에 빠지지 않을 지혜를 발휘할 수 있고,

자기를 생각한 만큼 미안해서라도 남에게 어질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처음에 공자가 말한 세 가지 도와 같다.

소체를 소중히 하니 군자가 되어 버렸다.

이거야말로 아이러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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