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 / 2020. 12. 18. 12:21

미리엘 주교와 자베르 경감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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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불후의 명작이지만 모두가 축약본을 읽었을 뿐 원본을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작품, 레미제라블!

빅톨 위고의 대표작으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어릴 때는 레미제라블이 아니라 장발장이 소설의 제목인 줄 알았습니다.

소설이 장발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그렇고 또 어린이에게 간단히 줄거리 위주로 들려주다 보니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쓴 책들이 많았습니다.

장발장은 사회에 대한 원한과 증오로 똘똘 뭉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5년간 감옥에서 지내게 됩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 치고는 너무 과한 벌이었습니다. 이에 4번의 탈옥과 재 수감을 거쳐 결국 19년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됩니다. 젊었던 그가 중년의 나이가 되어 출옥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장발장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인물이 둘 등장합니다. 바로 미리엘 주교와 자베르 경감입니다. 이 두 사람에 의해 장발장의 인생은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정의의 사도 자베르 경감

 

 

자베르 경감은 출옥하여 시장이 된 장발장을 알아보고 그가 범죄자였음을 밝히려고 끝까지 쫓아다닙니다. 

그는 사회 정의를 위해 매섭게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원칙을 철저히 지키면 지킬수록 차가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베르도 피도 눈물도 통하지 않는 경찰이었습니다.

 

그는 한번 범죄를 저지른 자는 또다시 저지른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들렌 시장이 과거 범죄자였던 장발장이란 것을 직감하고 끝까지 그를 쫓아다니며 그가 죄인임을 밝히려 합니다.

그가 장발장에게 개인적 원한이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사회 정의를 위해 그게 최선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신념대로 산 것뿐입니다. 

 

덕분에 회심하여 선하게 살아가는 장발장은 출옥을 했으면서도 또다시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탈옥한 것도 아닌데 도망 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 미리엘 주교

 

 

미리엘 주교는 카톨릭의 주교입니다. 그는 선행을 악행으로 갚은 장발장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장발장에게 또 선행을 베풀어 줍니다. 그로 인해 장발장은 회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을 가혹히 대했던 사회에 대한 원망과 증오심이 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이 되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게 됩니다.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사회를 원망하던 장발장의 모습 그대로 살았을 거 같습니다. 그랬다면 사회는 범죄자 한 명이 추가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의 사랑으로 사회는 자선가 한 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회 정의는 법과 이념이 아닌 사랑으로

사회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70, 80년대를 장성한 나이로 보내신 분들 중에 많습니다. 그분들은 주변에서 정당하지 못하게 억압받는 국민들을 보고 분연히 행동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모두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래서 타인을 위해 운동하다가 감옥에도 가고 쫓겨 다니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정신 무장을 이념으로 했다는 데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운동이 이념 운동이 된 것은 아닐지...

 

 

사회 정의를 이념으로 또는 법으로 이루려 하다 보면 우리는 자베르 경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정의를 사랑으로 이루려 할 때 우리는 미리엘 주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따듯한 바람이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 있었음을.

그리고 자베르 경감의 정의가 아니라 미리엘 주교의 사랑이 장발장을 회심시켰다는 것을.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을 처벌하려 했지만,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을 품어 주었습니다.

정의가 아닌 사랑이 답입니다. 정의를 구하되 사랑 안에서 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의 끝은 폭력이고 사랑의 끝은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검찰총장의 처벌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이쪽이 맞다 저쪽이 맞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의 판단은 누가 과연 사랑의 마음으로 일하고 있느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기준에 비추어 보면 검찰총장도 잘못 같습니다. 그의 모습에서 자베르 경감의 모습이 오버랩된다면 과한 해석일까요? 그를 경질하려는 장관의 모습도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합니다.

 

 

장발장을 변화시킨 건 자베르의 정의가 아닌 미리엘 주교의 사랑이었음을 잊지 않는 우리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걸 잊게 될 때 우리는 계속 이념을 이용하는 이들의 농간에 당하고 있을 겁니다. 

사랑이 답인 것을 모두가 깨달을 때에야 우리는 해묵은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우리가 꿈꾸는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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