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 / 2020. 12. 4. 13:15

대심문관 - 믿고 싶은 신, 믿어야 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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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그 유명한 '대심문관'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심문관은 종교재판과 마녀 사냥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중세 스페인의 세비야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내용은 어느 날 예수님이 1,500년 만에 다시 인간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날은 세비야 광장에서 종교재판으로 이단과 마녀 판정을 받은 사람들이 화형을 당하는 날이었습니다. 그 뜨거운 화형이 치러지는 광장에 인파 속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종교 수장이었던 추기경은 예수님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과연 그는 일반인도 알아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물론 아닐 겁니다.

 

 

그날 밤, 추기경은 감옥으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호되게 나무랍니다.

잘하고 있는 데 왜 내려왔냐고, 인간들이 말씀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광야에서 돌을 빵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안했냐고, 인간들에겐 기적이 필요하다, 기적이 있어야 인간들은 복종하고 딴짓 안 한다. 당신이 하늘로 승천할 때 우리에게 일을 맡기고 떠나놓고 왜 다시 나타난 거냐, 우리가 잘하고 있으니 방해하지 마라.

그리고는 감옥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내보냅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입니다. 절대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대충 이러한 말로 추기경은 예수님을 호되게 비난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과연 예수님이 지금 세상에 오신다면 혹시 소설대로 종교지도자들이 더 위험을 느낄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반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또는 아예 예수님이 실존했었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그들의 눈에 보이게 된다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올 겁니다. 없는 줄 알았는데 자기들의 눈으로 증거를 보니 안 믿을 이유가 없는 것지요. 설사 예수님을 부정하다 못해 욕하던 사람들도 막상 예수님이 자기 눈 앞에 나타나면 두려워서라도 믿게 될 겁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님이 실존 인물이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종교의 교리로 권세를 누리던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물론 타락한 일부 종교 지도자 들일 겁니다.

문제는 그 일부가 예전에 비해 많이 늘은 것 같다는 데 있겠지요.

 

그런 이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처럼 예수님을 배척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들에겐 예수님이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돈벌이와 권력의 수단이 되어 벼렸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요?

그건 자기가 믿고 싶은 신과 믿어야 할 신을 구분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믿어야 할 신을 믿는다면 그 신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즉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 자아, 고집을 죽이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쉽게 말해 자기 성질대로 살면서 어떻게 지도자의 말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믿어야 할 신이라는 단어에 벌써 자기 의지와 생각과는 다르지만 따라야만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내려놓기 또는 자아를 죽이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슷한 말로 공자는 '인'을 설명할 때 <극기복례>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죽여 예로 돌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나 믿고 싶은 신은 자기가 좋아하는 신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신은 어떤 신일까요?

그것은 나를 높여 주는 신입니다. 나를 높여 주는 신이 어떤 존재일까요?

그것은 신이 아니라 돈이요 권력입니다. 정말 신이라면 자신이 낮아져야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거나 자기를 높일 수 없습니다.

 

 

대심문관.

예수를 공부해서 추기경이 되었으나 정작 예수가 나타나자 그를 내쫓아 버리는 대심문관.

그는 참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예수, 즉 자기가 만든 가짜 예수를 믿은 것에, 아니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이 지금도 있을 겁니다. 없을 수가 없겠지요.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 수가 다른 시대보다 더 많냐 그렇지 않냐입니다. 그 수가 많아질수록 종교는 타락하고 사람들에게 고통이 됩니다.

 

바이러스로 온통 나라가 아니 전 세계가 머리가 아픈데, 꾸역꾸역 집회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걸 못하게 말리고 말을 안 들어 강제로 못하게 하려니 화염병까지 던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욕하는 정권의 비리를 찾기보다 자기들의 믿음 없음을 먼저 보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나도 교회를 다니지만 정작 예수님이 오신다면 과연 두려움보다 반가움이 더 클지 자신 없습니다. 저도 믿어야 할 신보다 믿고 싶은 신을 믿고 있는 건 아닌지...... 대심관의 모습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나의 모습이 아닐지......

말씀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묵직한 질문이 머리에 맴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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