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 / 2021. 1. 11. 17:42

세계로교회와 현대 철학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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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교회 대면 예배 강행과 네오 막시즘.

요즘 부산 세계로교회 대면 예배 강행 문제로 시끄럽다.

세계로교회 대면 예배 강행의 이유는 듣기로 정부의 비대면 예배 권고 조치가 종교 탄압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쎄... 이걸 종교 탄압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나라가 공산 국가나 이슬람 국가가 아닌데 종교 탄압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걸 왜 종교 탄압이라고 해석할까?

 

 

몇 해전 인터넷에 현대의 철학 사조와 관련하여 종교 배척의 흐름을 이야기한 글이 회자된 적이 있다.

요지는 현대 철학과 사상의 흐름은 네오마르크시즘의 영향을 받고 있고,

이러한 성향은 개인의 권리와 소수의 인권 문제를 부각해 공동체를 해체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오마르크시즘은 현대의 해체주의와 맞물려 자유세계의 질서를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파괴하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기독교 사상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창조 세계의 질서가 있다. 네오 마르크 주의자들에게 기독교의 창조 질서는 자유진영을 공고히 하는 힘이다. 그래서 이 힘을 깨뜨려야만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창조세계 질서는 서양의 근본 사상을 이루는 힘이다. 당연히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힘을 깨뜨리기 위해 개인의 권리와 소수의 인권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인권을 이야기함으로 해서 종교의 자유에 의해 기독교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고,

소수의 인권을 이야기 함으로 해서 동성애를 인정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창조 질서의 가장 근본적 형태인 가정을 해체하려 하는 것이다.

가정이 해제되면 자유세계는 힘을 잃게 되고 기독교는 그 근본이 부정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네오 막시스트들의 계략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네오 막시스트 들은 쉬운 말로 좌파 세력이다.

 

 

현대 한국 기독교의 위태로운 줄타기.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 좌파 정부로 규정되는 현 정부의 정책 기조는 교회에 적대적인 세력이라는 도식이 성립되었다.

이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청산을 못한 것과 625 전쟁의 후유증이라 할 수 있다.

625 전쟁으로 인해 친일파들이 기사회생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 반공정신을 방패와 무기로 해서 지금도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여기에 반공을 부르짖던 군부 독재 시절의 영향까지 더해졌다.

군부독재 세력과 친일세력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서로 연합하여 세력을 넓히고 공고히 했다.

군부는 민주 운동을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탄압했고, 친일파는 군부 세력에 붙어 반공의 선봉이 보수이고 자신들이 보수라는 등식을 성립시켰다.

 

 

<조찬 기도회 모습>

 

여기에 군부는 국가를 위한 조찬 기도회라는 희한한 기도 모임을 청와대에 만들었다.

그 자리에는 기독교를 믿지도 않는 군부 대통령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청와대의 모임에 참석한 각 종교 지도자들과 그 주변인들은 자신들이 국가의 지도자급 인사인 것으로 착각하고 정부에 협조하는 것이 국가를 위한 우국충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한 모임 자리에서 국가를 위해 뜨겁게 기도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미 군부 정권의 조력자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정부에 대항하는 민주 세력은 불손한 좌파 세력이라는데 동의하게 되고 그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로 인해 좌파 정부의 정책들은 항상 위험한 것이고 좌파 정부가 행하는 인권 운동이나 서민 운동은 남미나 동구권의 좌파 정부의 정책과 동일시하게 됐다. 좌파 정부의 정책은 네오 막시즘의 기독교 파괴와 자유세계 파괴를 위한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이를 막고 대항하는 것이 기독교를 수호하고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것이라는 이상한 사명감을 갖게 된 것이다.

네오 막시즘의 목적은 자유 세계 파괴다. 이를 위해 서양의 근본 사상인 기독교를 파괴해야 한다.

따라서 좌파세력은 국가와 기독교의 적이다 라는 도식을 갖게 된 것이다.

자신들도 모르게 순수한 신앙과 종교의 정치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세계로 교회가 방역 지침을 교회 탄압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철저히 방역 지침을 지켜도 모여서 예배를 못하게 하는 것은 종교 탄압이고, 다른 업종보다 더 모이지 못하게 하는 불평등 역시 이참에 교회를 약화시키려는 불손한 의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즉, 세계로교회 대면 예배 강행 의지는 그 교회의 목사님과 그 목사님을 동조하는 이들에겐 방역 지침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공산 세력과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네오 막시즘에 대한 거부 투쟁인 것이다.

 

 

전제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 보수 세력이 네오 막시즘이라 보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를 대항하기 위한 철학은 아니다. 나타나는 현상은 의도치 않게 그러한 흐름이 되긴 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목적이 기독교의 파괴는 아닐 것이다.

 

사실 지난 수 세기 동안의 철학 사조가 기독교의 무력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는 중세 시대의 엄청난 종교에 의한 탄압과 부패가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운동은 결국 종교라는 답답한 새장에서 탈피하고자 한 운동이다.

예를 들어 그전까지는 미술에 종교화만 있었다 한다. 그 그림들은 대부분 성자와 성모를 그리거나 성인을 그린 그림이었다. 따라서 복장을 갖추고 근엄한 표정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신은 항상 하늘에서 위엄 있게 앉아 있는 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자유분방하다. 신들이 술에 취하기도 하고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자유다. 해방이다. 그래서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 이후로 미술에는 남녀의 나체를 그리고 조각하기 시작했다.

 

<피렌체의 다비드 상(좌)과 니체(우)>

 

이후 이러한 사조는 지속되었고 급기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까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1. 마르크스는 밥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가 아니라 인간들의 경제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주장했고, 그 경제 활동에 의해 역사가 움직이다고 했다. 결코 신이 역사의 주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2. 프로이트는 인간에 내재된 것은 신성이 아닌 인성임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신을 지우게 됐다.

3. 여기에 도장을 찍은 사람이 니체다. 니체는 신은 죽었고 그래서 이제는 신 없이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후의 모든 철학 사조는 거의 이 흐름을 따르고 있다.

당연히 현대의 포스트 모더니즘도 이러한 흐름에 있는 건 맞다. 그러나 그 목적이 기독교의 파괴가 아닌 인간의 자유와 이성적인 사회 발전에 있음도 맞는 말이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이 기독교의 적대 세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기독교에 비 협조적인 맞지만 적대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들이 의도치 않아도 결과적으로는 기독교 파괴의 흐름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전제가 기독교의 파괴라고 생각하는 것과, 전제는 그렇지 않으나 의도치 않게 그런 흐름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전자로 생각하면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후자로 생각하면 대화가 가능하다. 고의가 아니라고 믿기에 대화와 서로의 이해가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서 - 위에 본 철학의 흐름이 맞는다는 전제 하에 - 기독교계는 신학만이 아니라 현대 철학도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대 철학이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라는 전제를 내려놓아야 한다.

또 하나 우리나라 기독교에서의 문제점인 자신들은 사회 지도층이고 사회를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대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 귀족 의식.

오늘 우리나라 기독교의 문제점은 그 교리의 배타성에 있지 않다. 배타적 교리를 가지고도 일제 시대와 625 이후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 지대하고도 선한 영향력을 끼쳐왔다. 일제 시대 항일 운동가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에는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 중에도 기독교인이 많이 있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종교인도 많이 있다. 지금도 실은 사회 성금은 기독교계가 가장 많이 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의 문제는 배타적 교리 문제가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금 한국 기독교의 문제는 종교 지도자들의 귀족 의식이 아닐까 한다.

자신들이 사회, 국가의 지도자 계층이고 종교지도자는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의식이 문제다.

 

자신들이 국가. 사회의 지도자라는 의식은 은연중에 그들의 마음에 귀족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모든 특혜와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고 자신들의 말이 곧 절대자의 말은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말이 절대자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의식은 당연히 독선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세계로교회 대면 예배 강행은 그 독선의 모습이 점차 보여지고 있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해법은?

세계로교회 대면 예배 강행을 고수하는 분들은 진심으로 교회를 위해 그러는 것이다.

현 정부에 각을 세운다거나 방역을 훼방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교회를 위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너무 몰아세우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종교 탄압의 명분만 더욱 커진다.

 

정부는 세계로교회를 비롯한 기독교 교회와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그래서 절대 종교 탄압이 아닌 방역을 위한 순수함을 이해시켜야 한다.

교회도 대면 예배 강행이 순수한 종교심에서 비롯한 것임을 정부와 언론에 이해시켜야 한다.

 

 

교회는 정부를 좌파 정책으로 교회를 탄압하려는 불순 세력으로 보지 말아야 하고,

정부와 언론도 도가 지나치게 마녀 사냥식으로 몰아가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사태를 얼마나 잘 해결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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