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행속수이상 오미상무회언 - 공평한 배움의 기회

2021. 4. 6. 10:37일상

    목차

논어를 통해 배우는 사람의 자세와 가르치는 사람의 자세를 생각해 봅니다.

 


 

공자가 말했다. "한 묶음의 포를 예물로 가져온 사람이면 내가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
(자왈 자행속수이상 오미상무회언)

 


 

 

 

논어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한 묶음의 포를 가져온 다는 것은 공부를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자신을 가르칠 스승에게 드리는 일종의 교육비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공자는 자신에게 교육비를 내면 다 가르쳐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르치는 자세

어떻게 들으면 교육비를 내야만 교육을 받을 수 있다로 들리기도 합니다. 공자는 자신에게 교육비를 내야만 가르쳤다는 이기로도 들릴 수 있습니다. 돈 없으면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다르게 해석하면 교육비를 내는 사람이면 가리지 않고 다 가르쳤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많이도 아니고 한 묶음만 가지고 오면 그 학생이 고관대작의 자녀이든 천민의 자녀이든 가리지 않고 가르쳤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마 후자가 맞는 해석일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합니다.

 

공자가 돈 가져오는 사람만 가르칠 정도로 재물에 눈이 어두운 사람 일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차별 없이 가르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문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차별없이 공평하게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자는 신분을 떠나 공평한 가르침을 실천했다고 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공자가 받았다고 하는 한 묶음의 포라는 것은 고기 말린 것을 말하는데 사실 당시 가격으로 따지면 아주 저렴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아주 조금이라도 무언가 가져오기만 하면 가르쳤다는 것인데 이것은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차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결코 돈 안 가져오면 가르치지도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육 받는 자세

 

그럼 아예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아도 가르칠 순 없었을까요? 아마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보여도 가르치지 않았을까 합니다. 실제로는 가르쳤으면서도 왜 한 묶음의 포라도 라고 이야기했을까요?

그건 배우는 사람의 자세를 말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거저 얻는 것과 조금이라도 값을 지불하고 얻은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값이 지불된 것을 더 귀하게 여기고 더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경험으로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공자는 공식적으로는 한묶음의 포라는 표현을 한 게 아닐까 합니다. 배우는 사람의 배우고자 하는 자세와 가르치는 사람의 공평한 가르침. 이 둘이 만나야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숙제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강남의 부유층이 받는 교육과 강북이나 시골의 빈곤층이 받는 교육이 공평할까요?

공교육은 공평하지만 사교육에서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교육기관에 내는 교육비에 따라 가르침이 다르고 배움의 질이 달라지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공교육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공교육이 무너진 지가 오래입니다. 교권의 추락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없다는 말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없으니 사교육 기관으로 가고, 사교육 기관은 돈에 움직이는 곳이니 공평한 가르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공교육의 무게가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이 시대의 교육관청과 공기관이든 사기관이든 가르치는 분들은 공자의 '자행속수이상 오미상무회언'의 말씀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