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마라구의 대표작입니다.
영화로도 제작되어 호평을 받았습니다.
소설가들의 창의성은 어디서 나올까요?
그들이 이야기를 꾸리고 풀어내는 것을 보면 감탄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도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먼다는 가정.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고 그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 과연 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갈까요?
아니면 생존 본능에 의존하며 동물처럼 생존해 갈까요?
- 간략 줄거리 -
무심한 일상의 흐름이 계속되고 있는 거리.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
신호가 바뀌자 습관처럼 엑셀을 밟으려는 운전자들.
그런데 맨 앞의 차가 움직이질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가가 보니 운전자는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절규합니다.
멀쩡한 시력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한 사람이 나서며 그의 차를 운전해 주어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주고 떠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숭고한 인간애를 떠오릴 수 있으나 실은 그는 자동차 도둑이었습니다.
눈먼 자의 차를 훔쳐 달아나던 그도 눈이 멀게 됩니다.
처음 눈 먼 사람은 안과에 가보나 이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병원의 안과 의사와 진찰받으러 온 다른 사람들도 눈이 멀게 됩니다.
이 전염병은 통제 불능의 속도로 퍼지고,
정부는 긴급히 비어 있는 정신병원을 임시 수용소로 만들어 눈먼 이들을 강제로 수용합니다.
처음 눈이 먼 사람 부부와 안과의사 부부, 그리고 다른 눈이 먼 사람들이 모두 수용됩니다.
그런데 안과의사의 부인은 이상하게 눈이 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편을 따라 수용소에 같이 갑니다.
그리고 남편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눈이 되어 줍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염병은 더욱 퍼져 수용소가 가득해지고 군인들에 의해 철저히 폐쇄됩니다.
그곳을 빠져 나가려는 사람은 가차 없이 총살을 당합니다. 하지만 나중엔 군인들도 결국 시력을 잃습니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눈이 멀게 되고,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처음엔 자체적으로 규칙을 세우며 질서를 잡아 갑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배급품을 가로채 다른 이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귀중품을 요구합니다.
그래야 식량을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귀중품이 떨어지자 이젠 여자들까지 요구합니다.
군인들마저 그들의 횡포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싸워서 모두 죽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참을 수없게 된 사람들은 손에 몽둥이와 연장을 하나씩 들고 그들을 공격하러 갑니다.
과연 그들은 폭력 집단을 물리치고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요?
- 감 상 평 -
보통 눈이 멀게 되면 온통 암흑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설 속 눈먼 자들은 세상이 하얗게 보입니다. 비정상적인 상황을 나타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 비정상적인 상황 아래서 정상적인 인간들은 얼마나 그 정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이건 생존을 넘어 인간 존엄성의 문제입니다.
수용소를 지키는 군인들은 눈먼 사람들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전염병의 전파를 막기 위해 오히려 모두 죽기를 바랍니다.
전체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개인에 대한 폭력입니다.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 사회가 필요하고,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 국가가 필요합니다.
때문에 국가는 개인보다는 전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 시스템 속에서 개인은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호는 전체에 대한 순종이 확인되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 순종에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전체는 개별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총을 든 무리의 횡포를 눈 감아주는 것,
아니 그것을 조장하는 간접적인 폭력도 있고,
수용소를 나가려는 사람들을 총살시키는 직접적인 폭력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변해 갈까요?
포기하고 본능에 따라 살거나,
그 반대로 어떻게든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급기야 필요도 없는 타인의 귀중품과 아내들을 총으로 위협하여 뺏는 악인들도 생깁니다.
질서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이들은 생에의 의지를 보여 줍니다.
이에 반해 탐욕스러운 인간들은 죽음에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들의 탐욕은 생을 포기한 자들의 잠시의 유희일뿐입니다.
그러나 질서파들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의지는 있으되 무력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작가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는 이들의 의지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의지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장실까지 갈 수도 없고, 이미 고장 나 오물이 가득하기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침대와 복도에 볼 일을 해결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구원자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종교적 메시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같은 인간끼리의 연대감과 헌신, 희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수용소의 아니, 세상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사람. 안과의사의 아내가 있습니다.
그녀는 시력이 있음을 숨긴 채 남편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돌봐 줍니다.
그들을 화장실로 안내하고,
총든 무리를 향해 "네 얼굴을 잊지 않겠다."라고 합니다. 그들이 여자를 요구하자 다른 여자들에 앞장서 가고, 여자들을 위해 악인을 죽이는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그건 약한 이들을 대신해 복수를 한 자기희생이었습니다.
눈먼 자들은 비록 보이지는 않으나 서로를 지켜 주기 위해 몽둥이를 들고 함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연대합니다. 그 앞을 안과의사의 아내가 인도합니다.
그런 연대와 헌신이 있을 때,
인간세상엔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그들이 서로를 보듬어 체온을 올려주고,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헌신이 있을 때,
시력은 다시 그들을 찾아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비록 거리는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짐승처럼 지저분해졌지만,
소설은 서로의 연대와 헌신이 있는 한,
참다운 인간 세계를 이룰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바이러스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보았던 연대가 보이질 않습니다.
타인들이 감염이 되든 말든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위해 집단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를 잡고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잠을 잊고 뛰는 사람을 살인죄로 고소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횡포로 인해 세상은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보듬어 체온을 올려주고,
타인들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있는 한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다시 광명을 찾을 수 있음을 소설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의 헌신으로 인해
그런 연대가 가능함을,
그 헌신은 바로 우리들 각자의 몫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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